내가 본 영화

기생충 Parasite 2019

데르벨준 2019. 6. 8. 00:00

유머에 뼈가 자꾸 내 명치를 치던 영화.

자본주의를 넘어 돈이 없는 빈자들의 삶이란

하수구 냄새 섞인 꼬름한 냄새에 절어 사는 냄새.

 

무말랭이 말린 향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숨길래야 숨길 수 없고

빨아보고 닦아내도 없어지지 않는 그 냄새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 삮혀내며 스스로 모멸감을 느껴야하는 그런 삶.

그 지점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부자가 보는 마당의 풍경과

빈자가 보는 골목의 더러움

 

저들끼리 싸우며 집의 어두운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려는 빈자의 모습

그런 그들이 있을 만한 공간과 삶을 궁금해하지도 않는 부자

 

서로 너무 다른 공간과 시야를 보지만

빈자만이 부자를 어떠한 환멸이든 동경이든 감정의 대상으로 본다.

 

그 사단을 내면서도 리스펙을 연신 외치는 꼬름한 냄새 아저씨와

주말 갑질의 선을 넘자 찍소리도 못하게 찍혀버린 송강호의 분노가 그러하다.

 

비오는 날 밖을 보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자유는 빈자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이유를

뼈저리게 안다.

 

초등학생 시절, 부천 고강동의 비닐 하우스에서 살던 내가

잠시 잘 사는 친척집에 놀러가 며칠을 지내고

돌아왔던 날.

 

장대비가 이틀 째 내렸던 그 날,

비닐 하우스에 쪽방이 물에 잠겼던 날이기도 했다.

 

그 순간의 부모님의 표정과 친척분들의 표정

그리고 그 상황이 머릿속 깊숙이 부끄러움과 상황의 모멸감으로 뿌리박혀 자리잡아

내 지난 18년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아마 송강호가 말하던 박사장 아이들이 겪지 못했던 그런 구김살이 

그런게 아닐까.

 

부자와 빈자

빈자와 시스템

시스템과 부자

 

부자는 빈자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고

빈자는 부자의 삶을 동경하고

시스템은 빈자의 환상을 부추긴다.

연석을 주었던 이는 다름아닌 부자이다.

 

착각속에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가족들은 몰래 먹던 술의 달콤함을 즐길새도 없이

바퀴벌레 마냥 숨어 있어야했고

풍경 좋은 마당 대신 끝없이 집을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잡은 거라고는 끝끝내 연석이었다.

거기서 눈을 가렸지만 적나라한 현실을 자조적으로

무계획 계획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 할 뿐이었지 않나.

 

요즘은 뉴스를 안본다.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가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지 않는 부조리에 눈을 돌려

내 현실에 집중하는 것이 더 편하다.

 

좌나 우나

전라도나 경상도나

남이건 여건

재벌을 찬양하든 비난하든

빈자를 도와주든 외면하든

언론을 욕하든 신뢰하든

 

세상은 

그저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 띠를 걷는 거 마냥

도돌이 표의 연속이다.

 

자각하길 포기한 대한민국이란

집에 사는 바퀴벌레 같은 빈자들에게

비극만이 존재하는게 당연한게 아닌던가.